k팝과 k건축: bts와 조민석, 그리고 셜록현준

2024.07 | new york

드디어 한국인이 서펜타인 파빌리온 설계를 맡는 시대가 왔다. 그동안 드라마와 영화, 그리고 음악 등 다른 예술 분야에서 꽃 피우던 한국 문화의 세계적인 성과가 드디어 k건축에까지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퍼지게 되는 듯하다. 다만 서펜타인 파빌리온 설계와 이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의 황금사자상 수상 등의 글로벌 실적이 순전히 조민석이라는 한 명의 개인이 이루어낸 성과이다 보니, 한국 건축 산업의 전반적인 성장이라고 말하기엔 아직은 조금 조심스러운 감이 있긴 하다. 그래도 항상 건축계의 변방이었던 한국에서 이러한 성과를 낸 것 자체가 상당히 고무적이고 흥분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 문화의 세계화를 생각할 때,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는 분야가 하나 있다. 바로 k팝이다. 물론 과거에도 꾸준히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한국의 다른 여러 예술 분야가 있었지만, k팝의 유행 이전에 우리가 흔히 말하던 소위 ‘한류’는 드라마나 영화 정도의 분야에 머물러 있었던 것 역시 사실이다. 특히 요즘처럼 한국의 문화와 예술 분야에 대한 관심이 세계 곳곳에 폭발적으로 퍼져나가는 데에 k팝이 지대한 공헌을 했음을 절대 부인할 수는 없다.

그리고 k팝의 유행과 인기가 급속도로 전세계적으로 퍼지게 된 것에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그룹은 역시 bts다. bts는 이제 k팝을 대표하는 그룹을 넘어 한국 문화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k-컬쳐의 상징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bts는 지금까지의 한국 아티스트들의 글로벌 음원 성적을 모두 보란 듯이 갈아치우며 압도적인 기록과 함께 세계 무대에 등장했다. 그동안 절대 닿을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빌보드차트 1위라는 위업을 달성한 것은 물론, 세계적인 팝스타들과의 콜라보, 유명 tv쇼 출연 등, 정말 월드 스타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은 그룹이 되어버렸다.

k-음악에 bts가 있다면, k-건축에는 한국인 최초로 베니스 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수상한데 이어 서펜타인 파빌리온 설계를 맡게 된 조민석이 있다. 조민석은 한국 건축가 중에 가장 세계적으로 성공했고, 가장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유럽에서 인턴 하던 시절에 회사의 외국 친구들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한국 건축가도 조민석이었다. gsd에 다닐 때도 그랬다. 학교에서 들었던 여러 수업에서 교수들의 레퍼런스로 종종 등장했던 한국 프로젝트가 딱 두 개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조민석이 설계한 부티끄 모나코였다. (다른 하나는 청계천이다)

황금사자상 수상자나 서펜타인 설계자 목록을 보면, 책이나 미디어를 통해서 접할 수 있었던 현대 건축계의 거장들 이름들이 쭉 나열되어 있다. 그리고 프리츠커 수상자들의 이름들 사이에, 조민석이라는 익숙한 이름이 등장한다. 아직까진 주로 국내 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긴 하지만, 조민석도 bts처럼 당당히 한국의 문화를 대표할 수 있는, 월드클래스라는 수식어가 무리 없이 잘 어울리는 듯하다.  

bts와 조민석은, 서로 분야는 다르지만 국내를 넘어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점, 쌓아 올린 국제적 명성이나 입지 등을 볼 때 상당히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둘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화려한 성과를 내며 한국의 현대 예술 및 문화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다만 그들이 국제 무대에 등장해서 성공하기까지의 여정과 방식은 매우 달랐다.

이제는 명실공히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k팝 그룹이라고 할 수 있는 bts가 인기를 얻게 된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전개 방식이 상당히 흥미롭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먼저 인기를 얻게 되었다는 점이 그렇다.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쯤 bts의 해외 인기가 슬슬 국내 매체에 소개되기 시작했을 때, 국내에서 대다수의 반응 역시 ‘쟤네가 그렇게 유명하다며? ...근데 쟤네가 왜?’ … ‘한국에서 더 잘나가고 실력도 좋은 아이돌이 널렸는데 왜 하필 방탄소년단이?’ 였다. 당시 빅히트의 대표였던 방시혁이 언급했었던, ‘유명한걸로 유명해지기’ 전략이 어느 정도 유효했던 것도 있지만, 단순히 이 전략만으로 bts의 그 인기와 성공이 가능했던 것만은 아니다.

k팝이라는 단어가 생기기도 전, 한국 아이돌 음악이 한창 새로운 전성기를 맞던 2010년대 초 무렵은, 흔히 말하는 국내 2세대 아이돌이 정점을 찍고 3세대 아이돌이 등장하기 시작할 때다. hot, ses 등으로 대표되는 1세대 아이돌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대중문화의 큰 부분으로 자리 잡은 이후 동방신기와 소녀시대 등 2세대 아이돌이 등장하며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 시기부터 국내 음악 산업은 완전히 아이돌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고, 여러 기획사에서 아이돌들이 말 그대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당시 국내 아이돌 시장은 이미 과포화 상태였고, 대중들 역시 매주 끊임없이 쏟아지는 새로운 아이돌에 피로감이 극에 달한 상태였다. 소위 말하는 3대 대형 기획사 출신이 아닌 이상 아이돌 판에서 성공하기는커녕 살아 남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이 시기, 한국에 있는 우리는 미처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그러나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있다. 바로 이런 과포화 상태의, 무한 경쟁 시장 속에서 국내 아이돌들의 퍼포먼스 수준 역시 전체적으로 상향 평준화 되어가고 있었다는 점이다.

3세대 아이돌 음악은 과거 1세대 아이돌들처럼 단순히 음악과 춤으로만 구성된 무대가 아니었다. 노래와 춤은 이미 전에 없던 최고 수준의 화려한 퍼포먼스가 기본이 된 지 오래였다. 거기에 추가로 그룹별 컨셉과 sf 영화를 방불케 하는 세계관, 패션 스타일 등등이 더해져, 아이돌 음악은 가히 하나의 종합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진화를 거듭해 왔다. 엑소 등으로 대표되는 이 시기 아이돌 음악은, k팝의 퍼포먼스가 전체적으로 정점에 달했을 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한국 아이돌 그룹들의 개성 있는 음악과 무대는 자연스럽게 다른 문화권 속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한편 이 시기, 때마침 급성장하며 음악 산업 구조를 완전히 뒤바꿔버린 게임 체인져가 하나 있다. 지금까지도 k팝을 비롯한 음악 시장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바로 유튜브다. 강남스타일의 초대박을 필두로 유튜브는 한국 음악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도가 올라가는 데에 절대적인 기여를 하기 시작했다. 2010년대 초에 한국 아이돌 음악 시장이 전성기를 맞게 되자, 먼저 아시아를 중심으로 한국 아이돌 그룹에 대한 해외 팬들의 관심과 인기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한다. 특히 이때만 해도 아직 한국과 해외 시장의 소통 창구가 지금처럼 제대로 개척되지 않았을 때였기에, 유튜브는 해외 팬들에게 있어 가장 쉽고 기본적인 접근 통로였다.

그러나 이때, sm을 비롯한 국내의 여러 대형 기획사에서는 큰 결정을 내리게 된다. 바로 저작권과 수익 정책 등의 이유로, 유튜브에서 해외 ip에 대한 국내 아이돌 그룹의 컨텐츠 노출을 제한시켜 버린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이 아닌 해외에서, 국내 아이돌 관련 영상을 시청할 수 있는 루트 자체를 기획사에서 나서서 먼저 차단해 버렸다. 사실 당시만 해도 유튜브 컨텐츠의 저작권과 수익 구조가 지금처럼 확립되지 않았을 때였으니, 기업의 관점에서 보면 아예 이해가 안 되는 결정도 아니긴 하다. 음반 판매실적과 음원 사이트 스트리밍 성적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시기였고, 대부분 수익의 초점이 국내시장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로벌 시장에서 폭발적으로 늘어날 조짐을 보이던 한국 아이돌의 인기와 대유행에 이러한 결정은 큰 걸림돌이 되었다. 무엇보다 해외 팬들 사이에서 서서히 늘어나고 있던, 한국 아이돌 컨텐츠에 대한 글로벌 수요를 해소할 길이 없어진 것이 문제였다.

그런데 이 당시 중소 기획사였던 빅히트에게 이러한 저작권 등의 이슈는 딱히 큰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아마 그 정도를 신경 쓸 만큼 회사가 큰 사이즈도 아니었고 수익 체계가 대형 기획사들만큼 시스템화 되어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유튜브가 지금처럼 회사가 본격적으로 관리할 만큼 메인 플랫폼이 아니었으니 소속 그룹의 유튜브 채널이 체계적인 회사의 지원이나 관리를 받지 못했음은 당연했다. 그런데 오히려 아이러니하게도, 방탄소년단 멤버들의 자유로운 유튜브 활동에 대한 회사 차원의 관리나 제제가 덜 했던 점이 이들에겐 엄청나게 큰 행운으로 작용하게 된다.

당시 국내에서 큰 인기를 끌지 못하던 방탄소년단 멤버들은, 정말 캐쥬얼하게, 자신들이 노래하고 춤추는 영상을 직접 찍어서 유튜브에 올리기 시작한다. k팝에 대해 늘어가는 수요가 충족될 방법이 없어서 컨텐츠에 목말라 있던 해외 팬들에게 이러한 영상들은 정말 말 그대로 최적의 영상들이었다. 한국 대중들의 시선에서는 그저 그런 수준의, 흔하디 흔한 아이돌 영상들이었을지라도, 해외 팬들에게는 엄청나게 신선하고 ‘입덕’하기 충분한 매력적인 컨텐츠였던 거다. 그리고 이는 해외 팬들 사이에서 ‘만약 k팝에 관심이 있고 입문하고 싶다면 먼저 유튜브에서 방탄소년단 영상들을 봐라’ 라는 공식이 유행할 정도로, bts에게는 엄청난 성공의 발판으로 작용한다. 세계적 인기의 시작이었다. 이후 글로벌 시장의 중요성을 깨달은 다른 기획사들이 뒤늦게 유튜브 등 플랫폼에 뛰어들어 해외 팬들을 공략하기 시작했지만, 이미 bts는 k팝의 선두 주자로서 거대한 해외 팬덤을 구축해 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이브는 과거 찬란했던 3대 대형기획사인 sm, jyp, yg의 시가총액을 모두 합친 것보다 큰 규모를 가진 독보적인 ‘1대’ 대형 기획사가 되었다.

물론 bts의 이러한 성공 역시 탄탄한 실력, 그리고 엄청난 노력이 뒤받쳐 주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을 수 있었다는 건 반박할 수 없는 분명한 실력이다. 다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모두가 실력이 어느 정도 뛰어난 상향 평준화 시대 속에서, bts에게 특별한 행운이 살짝 더 따라 주었던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유튜브라는 시대의 새로운 흐름에 제대로 편승했던 bts는, 결과적으로 가장 세계적으로 성공한 아이돌 그룹이 되었다.

조민석은 전형적인 기성 건축가의 성공 가도를 밟아온 건축가다. 국내에서 교육받은 후 해외 명문대에서 유학, 누구나 이름을 알만한 세계적인 사무소에서 근무, 그리고 국내 복귀 후 사무소 개소까지. 사실 요즘 국내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대부분의 기성 건축가의 행보와 상당히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학부생 시절 마주쳤던, 국내 대학교의 여러 교수님들과 소장님들 역시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 출신 학교나 근무했던 회사, 그리고 한국으로 복귀할 때 선택한 루트에 조금 차이가 있었을 뿐, 큰 틀에서 보면 그 행보가 많이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2014년, 조민석이 베니스비엔날레에서 한국인 최초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학부생의 시선에서 조민석은 가장 이상적이고 정석적인 루트를 통해 성공한 건축가로 보였다. 건축이라는 진로를 선택했을 때, 마치 정답이라고 할 수 있는 공식을 밟아 온 것으로 보였달까? 소위 말하는 ‘충분한 스펙’을 쌓고, 국내 무대에서 착실히 자기 일을 해 나가다 보면 긴 터널 끝에 화려한 빛이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처럼 조민석으로 대표되는 기성 건축가들이 밟아온 길이, 과연 10년 후, 20년 후에도 정답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요즘이다. 아니 어쩌면, 당장 지금 시대에도 이미 그 길은 존재하지 않는 길이 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조민석은 그 거대한 국내외 명성과 달리 외부 활동과 홍보에 관심이 없는 것으로 유명한 건축가다. 조민석의 사무소인 매스스터디스의 홈페이지는 수년째 업데이트가 멈춘 상태로 방치되어 있고, 요즘 그 흔한 sns 페이지조차 매우 비활성적으로 뜨문뜨문 운영된다. 또 학부는 연대를 졸업했지만, 한국 문화의 학연을 누구보다 싫어하고, 한국 건축계의 네트워킹에 큰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공공연히 알려져 있다. 많은 건축가가 사무소의 홍보와 자신의 입지를 위해 이름있는 학교에서 티칭을 하려 노력하는 것에 비해, 조민석은 꿋꿋이 학교와도 거리를 두고 있다. (고대가 조민석을 모셔 오기 위해 여러 방법을 동원해 삼고초려했지만 대차게 까인 것은 학교에서 유명한 스토리였다) 마치 자기가 가고 싶은 길만 바라보고 뚝심 있게 나아가는 장인이나 예술가 같아 보이기도 하고, 거장 건축가의 면모가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조민석은, 그렇게 한국 건축가 그 누구도 지금까지 가지 못했던 길을 당당히 개척하고 빛나는 성과를 이루어냈다.

조민석과 정반대의 세계에는, 최근 유튜브를 비롯한 여러 방송 매체를 통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독보적인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유튜버 셜록현준이 있다. 미디어에서 보여진 유현준의 화려한 언변술은, 하버드와 mit라는 학벌, 홍대 교수라는 타이틀, 그리고 리처드마이어 사무소에서의 짧은 (인턴) 경력으로 무장한 그의 백그라운드와 합쳐져 최고의 전문 방송인을 만들어냈다. 꾸준히 써내는 책과 강연 활동 역시 건축 비전공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다만 과거부터 지금까지 유현준의 건축 프로젝트들을 쭉 보면, 정말 말 그대로 ‘실력에 비해 한참 잘 된’, 과대평가 된 건축호소인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표작이라고 할만한 괜찮은 디자인의 프로젝트조차 하나 없으니, 솔직히 업계의 평균에도 못 미치는 디자인 센스와 실력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닐 정도다. 만약 건축 이외의 외부 활동으로 주조된 대중적 인기와 이미지가 없었다면, 최근처럼 지자체의 공공 프로젝트를 맡거나 지명 현상에 초청되는 등의 기회 자체를 절대 부여받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유현준이 가진, 대중들이 알기 쉽게 설명하고 글을 쓰는 능력 역시 무시해서는 안 될 타고난 재능인 것은 맞다. 시대의 흐름에 맞게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본인의 가치를 최대한 높게 포장한 점 또한 상당히 통찰력 있는 선택이었다. 또 한국에서 하버드 출신이라는 간판이 얼마나 큰 힘과 영향력이 되는지도 역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속사정이 어찌 되었든, 결과적으로 유현준은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 유튜버이자) 건축가다. 몇십 년 전 러브하우스 이후로 이 정도까지 일반인들에게 친숙하고 유명해진 건축가는 처음이 아닐까. 건축 전공자가 아닌 이상, 혹은 건축에 관심이 엄청나게 많지 않은 이상, 대부분의 일반인은 조민석은 몰라도 셜록현준은 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건축 전공자는 전 국민의 1프로도 되지 않는다. 건축인들 사이에서 조민석은 한국 최고의 국제적 성과를 이뤄낸 독보적인 건축가지만, 일반인들 사이에서의 인지도는 유현준에 한참 못 미치는 것이 현실이다. 유튜브나 외부 강연 및 컨설팅, 연예인 주택으로 무장한 유현준의 사업 수완 역시, 한 때 경영 위기까지 겪은 매스스터디스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최근에는 이러한 흐름에 맞게 유튜브 시장 속으로 뛰어들고 있는 후발주자 건축가들 또한 넘쳐나고 있다. 그저 시대적 유행에 휩쓸리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이 건축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건축가들이 과거보다 훨씬 더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특히 단지 기성 건축가들뿐만 아니라 국내 건축 무대에 첫 발걸음을 내딛는 젊은 건축가들 또한 이런 유사한 행보를 보이는 듯하다. 실무 경력이나 실제 프로젝트가 아닌,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등 소셜 미디어를 활용한 자기 홍보와 브랜딩은, 지금까지 선배 건축가들이 처음 사무소를 개업하고 경력을 확장해 나갈 때 전통적으로 밟아왔던 그 길과는 완전히 다른 길이다.

국내 시장을 넘어 전 세계 시장의 장벽을 뚫은 bts의 성공에, 유튜브라는 매체가 크게 기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소셜 미디어와 유튜브는 더 이상 젊은 층만의 유행이 아닌 현대 문화를 상징하는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이 플랫폼은 단순히 음악 분야에만 한정된 도구가 아니다. 흔히 예술 관련 분야 중에 가장 보수적이고 변화가 느리다고 말하는 건축 역시, 이제는 적극적으로 마주쳐야만 하는, 피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일 수도 있다. 제2의 조민석이 되기 위해서는, 아니 앞으로 이 건축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미디어의 활용이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일지도 모른다. 조민석과 같은 정석적인 루트를 거쳐 국내 무대에 데뷔하고 자리를 잡아가는 방식은, 이젠 요즘 세상에 맞지 않는 구시대의 낡은 방식이 되어버린걸지도 모르겠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세상이 원하는 건축가의 모습도 바뀌는 게 어쩌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명한 걸로 유명한’ 내실 없는 건축과, 전공자의 눈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디자인이 미디어와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현상을 보고 나서 느껴지는 거부감과 불편함은 숨기기가 힘들다. 프로젝트가 별로고 디자인이 안 예쁜데, 도대체 왜 사람들이 좋아하는 걸까. 혹시 저런 디자인이 인기를 끌 만큼 아직 한국의 문화적 수준이 그만큼 자리 잡지 못한 걸까, 아니면 하버드라는 간판이 그렇게 대단한 걸까… 솔직히 이 모든 고민이 내가 그동안 배운 것과의 다름에서 오는 괴리감인지, 내가 가지지 못한 인기와 유행에서 느껴지는 배아픔인지, 아니면 내가 지금까지 옳다고 믿어온 ‘조민석의 길’이 이젠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서 오는 것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국내에서는 무인양품의 디렉터로 우리에게 친숙한, 일본 출신의 세계적 그래픽 디자이너인 하라 켄야의 글은 2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꽤 강렬한 울림을 준다. 어쩌면 아마도, 세상에서 나만 이런 소심한 고민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보다.

“아무래도 사람들은 기술의 진보는 비판할 만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과거 산업혁명이나 기계 문명에 반기를 든 사람들은 선견지명이 없어 결국 찬밥 신세가 되고 말았다는 일종의 강박 관념이 현대인의 의식 깊은 곳에 뿌리박혀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누구나 느끼고 있을 불만을 입으로 내뱉지 못한다. 아마도 테크놀로지에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은 흔히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사회는 시대의 흐름을 좇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차없이 도태시켜 버린다.

그러나 오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한다면, 테크놀로지란 좀 더 천천히, 서서히 진화되었어야 했다. 시간을 들여 시행착오를 거쳐 숙성되는 편이 좋았다. 과도한 경쟁에 광분하여 불안정한 토대에 불안정한 시스템을 쌓아 놓고는 그것을 반복하면서 진화해 온 각종 기간 시스템은 불확실하고 깨지기 쉬운 체질을 지닌 채 질주하고 있으며 그 질주를 멈추지 못하고 점점 피폐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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