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phase를 다 경험할 수 있고 디자인 바깥 세상을 배울 수 있다는 건 shop의 크나큰 장점이지만, 반대로 그런 good balance는 shop이 가지는 큰 단점이 되기도 했다. 아무래도 컨셉, 디자인 단계부터 항상 현실적인 제약들을 반영하면서 디자인이 진행되다보니까, 초기 단계에서 이미 아이디어들이 타협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클라이언트가 싫어할 것 같으면 클라이언트한테 발표도 하기 전에 과감한 아이디어들은 내부적으로 정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안전을 추구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이미 한번 해본, 검증된 자기 복제 디자인이 계속 반복 되기도 했다. 내가 회사에서 했던 프로젝트들도 하나같이 무조건 일단 테라코타나 알루미늄으로 시작해서 지오메트리랑 색깔만 조금씩 바꾸다 끝났으니까..🙄
가끔 파트너들이 프레젠테이션 하는 걸 보면, 좀 과할 정도로 자세를 굽히고 클라이언트가 기분이 나쁘지 않게 눈치만 보기에 급급한 회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안전한 디자인으로 어느정도 결과물의 퀄리티가 보장된 디자인 서비스를 제공하니까 당연히 디벨로퍼들 입장에서는 이뻐하고 좋아할 수 밖에 없다. 강력하고 대담한 아이디어나 뛰어난 디자인보다는 현실적이면서 어느정도 신경쓴 것 같은 디자인을 하는 회사 — 지어진 결과물이 막 그렇게 구리지는 않지만, 실험보다는 안정적인, 검증된 디자인을 추구하는 회사 — 그게 딱 내가 느꼈던 shop의 인상이었다. 좋은쪽으로든 나쁜쪽으로든, generalist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이미지랄까?
사실 generalist라는 포지션이, urban designer의 마인드셋과 꽤나 일치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일하면서는 크게 불편함이 없었다. 오히려 이것저것 조금씩 다 해볼 수 있어서 더 좋은 회사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다만, 결국엔 어찌 됐든 design architect로 일을 하는 것이고, 또 나중에도 내가 AOR의 노선으로 나아갈 게 아니라면, 지금 회사에서 하는 디자인들이 조금은 애매해지지 않나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곤 했다. 아예 OMA나 REX, BIG처럼 디자인 쪽으로 특화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 AOR처럼 테크니컬한 부분을 다 커버하는 것도 아니니까, 나중에 내 커리어를 돌아봤을 때 지금 배우는 것들이 이도저도 아니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모든 걸 다 잘 한다는 건, 결국 뭐 하나도 다 제대로 못 한다는 의미일까.
그래서 shop을 다닐 때 항상 마음 속 깊은 곳에 불편한 마음이 있었다. 단순히 건축 스타일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디자인 퀄리티조차도 뭔가 항상 애매한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내 포트폴리오라면 절대 넣을 수 없을 것 같은 그래픽들 — 회사의 렌더 스타일만 봐도 요즘 트렌드와는 상당히 동 떨어져 있었고, 회사 다이어그램들은 매우 조악한 수준이었다. 지금이야 나도 완전 shop 워크플로우에 적응했지만, 그래도 나름 디자인 회사인데 포토샵이나 일러, 인디자인을 안쓰고 구글 슬라이드로 모든 걸 떼우는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아무래도 회사가 디자인도, 워크플로우도, 극한의 효율성과 수익성을 추구하다 보니까, 굳이 비싼 어도비로 하나하나 그래픽에 시간을 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또 회사가 굉장히 보수적이고, 또 안전한 low-risk low-return 비즈니스 모델을 추구하는 회사라서 더욱 그런 경향이 있는 듯 했다. shop은 돈을 받는게 확실하지 않으면 절대 일을 하지 않는다. 다른 건축 회사들과는 다르게 아시아 시장에 소극적인 것, 현상 공모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 역시 비슷하다. 검증되지 않은 나라, 도시, 클라이언트와 일을 할 때는 특히나 더더욱 보수적으로 다가가기도 하고… 많은 세계적 건축 회사들이 좋은 프로젝트를 따기 위해 전세계 도시의 국제 공모에 공격적으로 달려드는 것과는 정말 정반대의 스탠스다. 공모전에서 떨어지면 그대로 돈, 시간 낭비인데 왜 그렇게 기대값이 낮은 일을 해야하냐는 그런 느낌? 어떻게 보면 회사를 경영하는 입장에서는 정말 당연한 선택일 수도 있지만, shop이 앞으로도 뮤지엄이나 콘서트홀 같은 대규모 공공 프로젝트를 할 일은 없겠구나 싶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예전에 일했던 BIG이나 MVRDV같은 회사와 비교해보면 절대 design firm이라고 부를 수 없는, 디벨로퍼 느낌이 강한 회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당연히 유럽과 미국의 건축 업계 문화가 다르고, 회사의 비즈니스 모델이 다르기 때문에 단순히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입사한 이후로는 shop이 디자인 회사로 느껴진 적이 거의 없었다. 뭔가 확실히 다른 디자인 회사들과는 회사 분위기도, 사람들 바이브도, 그리고 결과물에서도 야마의 차이가 느껴졌다🫠
회사 사람들도 전체적으로 그래픽이나 디자인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서, 내가 스트레스 받는 게 오히려 나만 손해인 느낌이었다. 정말 기본적인 align, lineweight, 색 배치 같은 것들도 크게 관심 없는 사람들이 태반이었고, 전달하려는 내용만 clear하면 윗사람들도 그래픽은 크게 문제 삼지 않는 듯 했다. 사실 shop은 직원을 뽑을 때도 포트폴리오 자체보다는 레퍼럴, 인맥으로 뽑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디자인 스킬 보다는 커뮤니케이션 스킬을 보고 hiring 하는 일이 많아서 회사가 이런건가 싶기도 했다. 그래서 회사 사람들이 대체로 커뮤니케이션, 코디네이션, 드로잉 스킬은 최상급이지만, 디자인 센스는 오히려 웬만한 회사, 학교에서 만났던 사람들 보다 훨씬 떨어지는 느낌이 다소 있었다.
사실 shop이 다른 건축 회사들에 비해 야근도 적고 워라밸을 지키면서 일을 하는 회사이다 보니까 어쩔 수 없는 결과인가 싶기도 하다. 팀 바이 팀이긴해도 회사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6시에 칼퇴하는 분위기라서, 윗사람들도 최대한 시간 낭비 없이 효율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시키려는 느낌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결국은 새로운 길보다는 검증된 방향을 택하는게 또 제일 안전하고… 슬픈 현실이지만, 결국 건축은 사람을 갈아넣지 않으면 그만한 퀄리티를 내기 힘든 걸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람들 말처럼 유니온 사태 이후에 애들을 못 갈아넣으며 디자인 퀄리티가 급감했다는 비판이 크게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회사 초기작들을 보면 ‘BIG 이전에 사실 뉴욕에 shop이 먼저 있었지’ 라고 생각될 정도로 눈에 띄는 디자인들을 많이 하는 회사였는데, 요즘 회사의 프로젝트들을 보면 90년대 락 밴드 같던 젊은 뉴욕 회사의 패기와 쿨함은 많이 사라진듯 했다. 특히 최근 들어 대형 디벨로퍼들과 같이 많이 일하면서 타워들을 주로 맡기 시작할 때 부터 회사의 방향성과 운영 방식이 조금 바뀐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좀 영 한 이미지가 있는 회사였는데 이제는 그냥.. 꼼짝없이 영포티가 되어버렸다…🥲)
—
shop에서 일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뭐니뭐니해도 회사에서 뿌리 깊게 박힌 미국 문화, 백인 문화에 적응하는 일이었다. 단순히 일할 때 뿐만 아니라, 회사의 전반적인 문화 자체가 굉장히 아메리칸 그 자체였다. 디렉터나 AP이상의 윗사람들은 90% 이상이 미국 백인들이었고, 회사 전체로 봐도 7-80%의 사람들이 미국 백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당연히 인터네셔널한 학교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 였고, 회사의 이벤트나 소셜라이징 하는 자리에서도 미국미국스러운 분위기가 만연했다. 특히 회사에서 자리 잡고 승진하기 위해서는 그런 소셜라이징을 싫어도 열심히 해야하는 분위기가 없잖아 있기도 해서, 정말 이 회사에서 오래 다니더라도 핵심 라인이 되거나 파트너들과 깊게 친해지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래서 미국의 정치, 역사, 문화를 잘 알고, 또 최근 이슈들을 캐치업하지 않으면 스몰톡은 따라가기도 버거웠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면 모두 알 수 밖에 없는, (하지만 미국인이 아니라면 절대 모르는) 70, 80년대 미국의 팝 컬쳐 레퍼런스들은 매일매일 스몰톡과 미팅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단골 주제였다. 그래서 입사 초기에는 무슨 얘기하는지 따라가려고, 퇴근하고나서 뉴욕과 미국의 유명한 70년대, 80년대 영화, 음악, tv 프로그램들을 혼자 따로 찾아보고 공부하곤 했다.
특히나 연봉 협상이나 프로젝트, 팀 배치 등등 회사에서도 민감한 이슈들을 얘기할 때면 그 문화적 차이가 더 크게 다가왔다. 미국애들은 적당한 타이밍에 말을 예쁘게 해서 당당하게 자기들의 요구 사항을 회사에 말하는 법을 이미 사회적으로 체득하고 있는데, 외국인으로서 똑같은 상황에서 그런 대화 스킬을 가지는게 정말 쉽지 않았다. 두루뭉술하게 말하면 제대로 알아듣지를 못하고, 또 조금만 톤 조절을 잘못하면 굉장히 불만 많은 사람처럼 공격적으로 들리다 보니까, 그 정도를 몰라서 말할 때마다 항상 상대방 눈치를 보면서 말해야 했다. (나도 인도 프로젝트를 하다가 한번 HR에 가서 팀장 욕을 엄청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내가 아마 수위 조절을 잘못했는지 HR이 깜짝 놀라며 바로 나를 관심병사로 대우해주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회사에서 힘든 해외 프로젝트들에는 외국인들이 몰리고, 미국인들은 재밌고 편한 프로젝트들 하는 느낌이 좀 있긴 했는데, 뭐 인종차별까지는 아니지만…회사에 그런 묘한 분위기가 깔려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국 백인들 특유의, 겉으로는 언제나 웃어주고 친절하게 좋은 ‘척'하는 문화에서 그들의 속마음을 알기가 정말 너무 어려웠다. (근데 이건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죽어도 모를 것 같다..) 특히 앞에서는 허허 웃고 놀다가 갑자기 사람들을 예고도 없이 짤라버릴 때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어쩔 때는 사람들이 과하게 친절한가 싶다가도, 또 어쩔 때는 칼 같이 차가워지는 걸 회사 다니면서 워낙 많이 봐서, ‘아 미국놈들은 역시 겉모습만 보고 믿을게 못되는 구나’ 싶었다..🌚
물론 그래도 항상 겉으로는 웃어주니까 당연히 거기에서 오는 가짜 편안함은 있었다. 일반적인 건축 회사들처럼 인격적으로 지랄 맞은 사람이나 히스테리 부리는 사람들도 거의 없었고, 프로젝트가 산으로 가도 다들 웃으면서 젠틀하게 설명해주는 분위기라서, 초반에는 멘탈 관리에 도움이 되긴 했다. 물론 짬이 좀 찰 수록 사람들의 속마음을 모르겠어서 더 스트레스 받을 때도 있었지만, 확실히 전반적으로 사람들이 점잖아서 회사의 분위기가 언제나 필요 이상으로 과하게 밝긴 했다. 아직도 이 회사의 문화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떻게 보면 외국인이 다니기에는 쉽지 않은 회사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반대로 외국인이 미국 문화를 맛보기에 최고의 회사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결국 영어 학원이라고 생각해야 제일 마음 편한 회사인 것 같기도 하다😅
—
졸업하고 첫 직장을 구할 때 shop을 선택한 큰 이유 중에 하나는, 미국에서, 그리고 뉴욕에서 일할꺼라면 아무래도 유럽 회사보다는 미국 회사에서 일하는게 미국 유학의 목적에도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결정은 지금 돌아봐도 틀리지 않았고 잘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자신있게 남들에게 추천할만한, 좋은 회사인지는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미국과 뉴욕의 건축 산업의 시스템을 배우기에는 최고의 회사이기도 하고, 미국에서 일하는 방식,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배우기에도 참 좋은 회사였다. 특히 뉴욕에서 가장 뉴욕다운 건축 회사를 하나 고르라면 지금 생각해도 고민없이 shop을 고를 것 같다.
shop은 뉴욕의 건축회사라는 자부심이 상당히 큰 회사였다. 파트너들은 뉴욕이라는 도시를 사랑했고, 그래서 shop의 건축에는 뉴욕의 역사적 디자인 요소들에 대한 레퍼런스나 오마쥬가 많았다. 20세기 초중반 뉴욕의 첫 고층 빌딩들에 있던 테라코타 장식들, 맨하탄 밤 거리의 네온사인들, 100년 넘은 기찻길, 다리의 industrial한 철제 구조물들 등등, 뉴욕을 상징하는 여러 이미지들이 회사의 디자인에 녹아 들어 있었다. 회사 미팅 때도 자주 뉴욕과 미국의 역사에 대한 얘기들이 나오곤 했는데, 특히 대부나 스콜세지 영화들처럼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고전 영화들은 미팅 때 마다 레퍼런스로 언급돼서 거의 직원 필수시청자료였다.
컬럼비아 대학원생들이 뉴욕을 동경해서 만든 회사가, 결국에는 맨하탄과 브루클린 한복판에 랜드마크를 디자인해서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바꿔낸걸 보면, 그 짧은 기간안에 shop을 뉴욕을 대표하는 건축회사로 성장시킨 파트너들에게 소년만화의 낭만이 느껴지긴 한다. 요즘은 회사에 뉴욕 프로젝트가 예전처럼 많이 없어서 회사의 큰 강점과 아이덴티티도 많이 약해진 느낌이긴 하지만, 언젠가 뉴욕의 건축 시장이 되살아나면 shop도 다시 예전의 명성과 야마를 금방 되찾게 되지 않을까 싶다.
뉴욕에서 일하면 맨하탄과 마티니는 마실 줄 알아야 한다며 바에서 팀원들에게 맨하탄을 시켜주면서 뉴요커가 된 걸 환영한다던 그렉처럼 — 그리고 자기들은 재미없는 countryside를 싫어하고 도시를 동경한다며, 아직도 뉴욕에서는 아메리칸 드림이 가능하다고 믿는다던 크리스처럼 — 나도 모르게 내 맘속 깊은 곳에서는 뉴욕이란 도시에, 그리고 shop이라는 회사에, 나도 많이 스며 들지 않았을까. 이제는 내 인생의 레쥬메에서 뺄 수 없게 된 3년 8개월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이, 나중에 돌이켜 봤을 때 나에게도, 그리고 shop에게도 자랑스러운 시기로 남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