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건축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흥미로웠던 점 중 하나는, design architect와 executive architect의 역할, 업역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하나의 설계사무소가 디자인부터 실시설계, 건물 허가까지 도맡아서 하는 한국의 시스템과는 꽤 달랐다. 미국은 한국에 비해 디자인에 대한 존중이 더 있는 문화이기도 하고, 또 디자인만으로도 회사 운영이 어느정도 가능할 정도로 업계에서의 처우가 괜찮은 시장이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한국은 여전히 아파트 위주의 건설업이 건축 시장을 주도하고 있으니, 디자인보다는 개발, 시공 분야가 프로젝트에서 최우선 되는 것은 아직은 어쩔 수 없는 듯 하다.)
우리가 흔히 아는 OMA나 BIG 같은 해외의 유명한 건축 회사들은 대부분 주로 design architect에 해당 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디자인 회사들은 주로 컨셉이나 SD 단계까지만 힘을 많이 쏟고, DD, CD 부터는 적게 관여하거나 executive architect에게 일을 넘긴다. AOR - architect of record라고도 불리는 executive architect는 주로 CD나 CA, 법규 검토나 건물 허가까지, 디자인 된 건물을 현실에서 지어지도록 하는 실무 역할을 담당한다. (돈은 당연히 AOR이 훨씬 잘 번다.) 특히 미국은 땅덩어리가 워낙 크다보니 주 마다 따라야 하는 건축 법규가 다 다르기 때문에 이런 분업화가 잘 자리 잡힌 듯 했다.
shop 역시 대표적인 design architect firm 중 하나이지만, shop은 또 디자인 회사 중에서는 그래도 꽤나 later phase, construction에 관심이 많은 회사이기도 했다. DD, CD는 물론이고 AOR 까지도 직접 맡아서 하는 프로젝트들도 종종 있었으니까, 사실상 모든 phase를 다 하는 회사라고 볼 수 있다. 회사가 공개적으로 자기들은 generalist라고 포지셔닝을 하고 있는 걸 봐도 그렇다.
아마 constructability, fabrication이 shop의 뿌리이자 아이덴티티 중 하나이기 때문에, 그런 마인드셋이 회사에 아직도 강하게 남아있는게 아닐까 싶었다. 회사 초창기에 shop을 스타덤에 올려준 moma ps1 프로젝트부터 최근에 지어지는 뉴욕의 여러 타워들까지, shop에서는 언제나 아이디어가 어떻게 현실세계에서 materialize되고 지어질 수 있는지가 중요했다. 예전에는 회사에 shop construction이라는 자회사가 있었을 정도로 그만큼 지어지는 것에 진심인 회사였으니, 어떻게보면 design-build의 느낌이 아직도 조금 남아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컨셉이나 디자인 스터디를 할 때도 constructability를 항상 고려해야 했다. 모델링을 하거나 그림을 그릴 때도, 언제나 모든 재료들이 현실 세계에서 가능한, 경제적이고 말이 되는 사이즈로 그려져야 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보여야 했다. 전에 인턴했던 BIG이나 MVRDV에서는 현실성을 크게 고려하지 않고 개념적인 디자인을 초반에 무작정 몰아 붙이다가 나중에 클라이언트들이 디자인을 전면 재수정시키는 일들이 종종 있었는데, shop에서는 그런 경우가 확실히 덜 했다.
design firm이지만 construction 단계까지 고려하면서 디자인 한다는 점, 그리고 그 스케일이 아뜰리에처럼 소규모 건물에 국한되지 않고 스타디움, 타워같이 큰 규모의 건물까지 확장된다는 점은 shop이 가지는 가장 큰 장점 중 하나이다. 대형 프로젝트의 다양한 phase를 한 회사에서 모두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은, 특히 나처럼 커리어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장점으로 다가왔다. 대다수의 유명 디자인 회사들에서는 정말 말그대로 그림만 계속 그리는 경우도 많고, 일을 하면서 later phase의 경험을 제대로 못해보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DD, CD 수준의 건물 디테일은 잘 알지도 못하고 원래 크게 관심조차 없었지만, 내가 디자인한 부분이 어떻게 실제로 작동하고 현장에서 만들어지게 되는지까지 생각하고 디벨롭 해가는 일이 그 나름의 재미가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일하면서 배운 지식들이 인생 목표 중 하나 였던 건축사 라이센스를 따는데도 정말 큰 도움이 되었고, 컨셉과 내러티브만 좋아했던 회피형 건축가였던 내게 분명 필요한 훈련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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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shop에서 일하는 4년 가까운 시간 동안 DD, CD를 해보면서, 건축에 대한 내 생각과 가치관도 많이 바뀌었는데, 그 중 가장 큰 부분을 뽑는다면, 역시 drawing set에 대한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건축의 꽃은 컨셉과 개념에 있다고 생각하고 드로잉에는 큰 관심이 없이 살아온 나였는데, 실무를 하자마자 10년 넘도록 가져온 건축관이 바뀌게 될지는 나도 몰랐다.
사실 건축 프로젝트에서 핵심이 되는 부분이 개념이나 디자인에 있는지, 아니면 실제로 지어지는 building의 디테일과 construction에 있는지는 개인마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둘 중 어느 하나가 더 우위에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뉴욕에서 4년 가까이 일하면서 강하게 느낀 점이 하나있다. 디자인만 하고 그걸 다음 단계로 진행시키지 못한다면, 적어도 미국에서는, 그 디자인을 건축이라고 부를 수 없다. 지어지지 못하는 컨셉, 지을 수 없는 디자인은 아무리 좋아도 학생 수준의 낙서, 그림일 뿐이다.
그리고 건축 회사가 디자인을 남들에게 전달하는 방식, medium은 프레젠테이션도, 모델도, 렌더도 아닌, 결국엔 drawing set이다. 컨설턴트, 클라이언트 미팅을 수없이 거쳐 DD, CD 레벨의 drawing set 형태로 만들어내고 그걸로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없다면, 건축가라고 부르기 어렵다. design architect이라고 할지라도 최소한 AOR, 컨설턴트들과 소통할 수 있는 수준의 지식과 대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아예 아카데미아 안에서만 살아간다면 상관없겠지만, 결국엔 드로잉 셋을 그릴 수 없다면 건축가는 그림 그리는 화가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적어도 미국의 건축시장에서는 그렇다. PM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renders are fake, drawings are real’ 이 틀린 말 하나 없는 듯 했다.
3d 모델링 뿐만 아니라 VR, AR, AI 까지도 이용해서 건축을 표현하고 경험할 수 있는 요즘 세상에, 아직까지도 종이에 인쇄되는 2차원의 도면들이라니! 인류가 지난 수백년 동안 건물을 지을 때 사용했던 그 방식이 현재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는 걸 보면, 결국엔 드로잉이 진짜 건축의 정수일까? 싶었다. 21세기에도 대체 되지 않은 이런 상당히 아날로그적인 방식이, 가끔은 좀 낭만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여러 회사들이 수십년동안 쌓아온 스탠다드와 노하우, 그리고 수많은 컨설턴트, 클라이언트들에게서 오는 현실성, 경제성에 관한 인풋들, 이 모든 것들이 반영 되어 만들어지는 단 하나의 결과물이니까, 프로젝트의 핵심이자 본질은 결국엔 드로잉 셋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드로잉 셋을 해보면서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은, 건축 드로잉이 단순히 테크니컬 한 지식으로 그리는 기술에만 있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그냥 단순히 평면 입면 단면을 2d로 그리는 일인 줄 알았는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드로잉의 핵심은 컴퓨터 속 3d 모델에 존재하는 복잡한, 가상의 디자인을 정말 최대한 효율적으로, 최소한의 도면을 통해서, 종이 위에 clear하게 표현해내는 스킬에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계약서에 명시된 건축가의 책임 부분과 아닌 부분을 명확하게 구분해서 표현하는 것 — 건축비 산정에서 빠지는 부분이 없도록 모든 디자인 요소들을 포함시키는 것 — 그리고 그렇게 owner, architect, contractor 등 모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공용언어로 내 아이디어를 간단-명료하게 전달하는 것 — 그게 진짜 건축 드로잉 실력이었다.
최소한의 redundancy와 최대한의 clarity! 단순히 도면을 많이 그리고, 복잡한 디테일을 그린다고 좋은 드로잉 셋이 아니었다. 똑같은 디자인을 두고 내가 끙끙대다가 몇십장의 도면으로 그렸는데, 팀장이 한 두장의 드로잉에 텍스트 몇 줄로 모든 복잡한 디자인과 책임 부분을 전부 담아내는걸 볼 때는, 괜히 짬이 있는게 아니구나 싶었다. 가끔은 정말 변호사처럼 섬세하게 단어 하나하나도 한참 고르고 또 수정하고, 고소 당할 껀덕지를 최소화 시키는 과정을 옆에서 보고 나서는, 어쩌면 드로잉 셋이 진정한 종합 예술이구나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게 드로잉을 직접 그려보면서 경험하고 나니까 건축을 보는 눈도 조금씩 넓어지기 시작했다. thomas phifer나 richard meier 드로잉 셋을 봤을 때, 그제서야 그 사람들이 고수라는게 더 이해되기 시작했고, 그들의 건축이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디자인 의도가 정말 명확히 표현된 엄청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거장들의 드로잉 스킬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아마 shop에서 배우고 시야가 넓어지지 않았다면 그런게 보이지도 않고, 그런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지 않았을까.
DD, CD를 처음 하다보니까 드로잉 셋의 의미와 중요성을 온몸으로 부딪히며 느낄 일도 많았다. 인도 프로젝트를 할 때는 내가 맡은 부분의 드로잉이 수준 미달이라 클라이언트한테 공격 받고 프로젝트 자체가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다. 뭐 사실은 제대로 안가르쳐주고 리뷰를 제대로 안한 팀장 탓이지만, 내 잘못 때문에 회사가 설계비를 못 받을 때는 좀 식은 땀이 나긴 했다… 뉴욕 프로젝트를 할 때는 내가 명확히 재료나 마감을 제대로 표현하지 않았다가 건축비 산정에서 큰 빵꾸가 나서 회사가 부랴부랴 수습해준 적도 있었다. (그때 회사에서 하나 배운건, 우리 실수로 누락된 부분이 있더라도 절대 우리 실수라고 인정하면 안되고 일단 무조건 남탓을 하거나 변명을 해야한다고 한다😅 인정을 해버리면 나중에 언제 고소를 당하거나 우리 책임으로 다가올지 모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