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모전 상도 받을 만큼 받았고 스튜디오 결과물도 그럭저럭 잘 나오기 시작했지만 아직까지 갈 길이 막막했는데, 무엇보다 졸업 설계라는 가장 큰 산이 문제였다. 나 역시 건축 공부하는 모두가 그렇듯 졸업설계를 앞두고 욕심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고, 그러다 해보고 싶은 것도 배워보고 싶은 것도 점점 많아져서, 결국 나와 정반대 스타일인 교수님들의 스튜디오를 듣게 되었다. 스페인 교수님 한분과 완전 한국에서만 실무하시는 교수님 한분께서 가르치는 스튜디오였는데, 수업 목표가 약간 무조건 지어질 수 있는 현실적인 건물을 설계한다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졸업하고 아뜰리에에 취직하려는 사람들에게나 좋을만한 스튜디오였고 유학, 특히 미국 유학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느낌의 스튜디오였다.
사실 수업을 듣기 전부터 나와 안맞을꺼라는 걸 알았지만 내가 못하는걸 배워서 완벽한 포폴을 만들꺼라는 야심찬 마인드로 신청을 했는데, 정말 고생만하고 아무것도 얻어가지 못했다. 예전 4학년 때 교수님께서 해주신 말씀 중에 ‘건축 안에서도 모든 분야를 잘하는 사람은 없다, 자기가 잘하는 걸 잘하는게 제일 중요하다. 다 잘하면 그건 사실 다 제대로 못하는거다.’ 라는 명언이 있었는데, 그 말을 안 들었던게 참 후회가 됐다. 교수님 이제야 깨달아요..🥺
고대건축의 졸업설계는 보통 3월에 시작해서 두 학기를 한 후 12월에 최종 졸업전시를 하게 되는데, 그 중 반을 시원하게 날려버렸으니 매우 큰일이었다. 게다가 2학기는 다들 취준에 전시 준비, 포폴 준비로 수업도 제대로 안하는 분위기라서 정말 비상상황이긴 했다. 그래도 이렇게 있다간 2학기까지 날릴꺼 같아서 설계는 일단 쉬어가기로 결심하고 그 다음 학기엔 스튜디오 수강신청을 안했다. 또 마침 학점 복구라는 명분도 있었으니, 망한 수업들 재수강도하고 미대에서 듣고 싶었던 art history랑 다른 미학 교양도 맘껏 들으면서 한 학기를 신나게 보냈다. 아마 고대에 있던 8년 중 제일 스트레스 덜 받고 재밌게 다녔던 학기가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남은 6개월은 영어에 올인을 했다. 인생의 전부가 해커스였던 이 6개월은 내 유학 준비 기간 중에서 가장 끔찍했던 시간이었다. 지나고보면 포폴 준비나 졸업설계는 그래도 나름 즐기면서 했었던 것 같은데, 영어학원은 정말이지 꿈도 희망도 재미도 없던 심연 같은 곳이었다. 이젠 나한테 약간 군대랑 비슷하게 꼴보기도 싫은 느낌이 되어버린 강남역 10번출구로 매일 아침마다 학원을 가면서, 빨리 지겨운 영어말고 졸업작품이든 포폴이나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gre는 정말 말그대로 암흑 속에서 헤메는 그런 느낌으로 학원을 다녔었고, 토플은 1점을 올리려고 지겹게 시험을 계속 봤다. 그리고 마지막 시험에서 네 과목을 다 모든 학교의 preferred 기준을 넘기면서, 간신히 목표했던대로 어찌어찌 여름까지 토플과 gre를 끝냈다.
영어 문제가 해결된 2018년의 8월 쯤, 남아있는 일은 아직 시작도 제대로 안한 포트폴리오와, sop, 추천서 등등… 사실상 영어점수 빼고 다 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졸업 설계와 전시가 12월에 기다리고 있었다. 학교 어플라이가 보통 12월 말쯤 시작이니까 4개월 동안 졸전+포폴+어플라이 를 모두 끝내야 하는 말도 안되는 상황이었다. 특히 졸업설계 한 학기를 이미 날려버린 상태였던 나는 더 이상 한 순간도 시간 낭비를 해서는 안됐다. 정말 일주일 일주일을 잘 보내는게 중요했고 크리틱 한번 한번의 기회가 너무 소중했다. (그 와중에 예비군 동원 때문에 4일을 날릴 땐 진짜 남+북조선이 정말 원망스러웠다…🌚)
예전 5-1에 들었던 스튜디오는 유학엔 도움이 안되는 수업 같아서, 당장 바로 다른 교수님 스튜디오로 런했다. 워낙 설계 안하는 애들이 몰리는 꿀빠는 스튜디오로 유명한 곳이었지만 그래도 평이 좋은 교수님들이었고 무엇보다 두 분이 다 유학파셔서 포폴 준비에도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았다. 문제는, 보통 졸설은 일년을 쭉 같은 스튜디오를 듣는게 일반적이다보니 나만 혼자 스튜디오에서 굴러온 돌이었고, 또 다른 애들은 이미 프로젝트는 1학기에 거의 다 끝내고 취준에만 올인하는 상황이라 나 빼고는 다들 이미 졸업설계가 어느정도 완성된 상태였다. 그래서 교수님도 애들도 수업은 그냥 대충대충 넘어가는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그래도 난 도저히 1년 전에 하던 프로젝트는 다시 소생시킬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시간은 없지만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기로 했다.
예전에 공모전에서 서울 한복판에 공동묘지를 하다가 망한 적이 있었는데, 그걸 다시 살려보면 어떨까 싶어서 교수님께 슬쩍 가져 갔다. 교수님께 보여주자마자 역시 바로 대차게 까였고, ‘왜 죽은사람을 하려하냐, 그냥 산 사람으로 해라—아파트해 아파트!’ 라는 교수님의 무정한 한마디에, 한순간에 졸업설계 주제가 공동묘지에서 하우징이 되었다. 참 까칠하고 무서웠던 교수님이시지만,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매우매우 고마우신 귀인이다. 공동묘지나 죽음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학부생이 깝친다고 졸설 주제를 공동묘지로 하는게 참 같잖아 보이시지 않았을까... 사실 그런 감성적이고 철학적인 건축이 사실 나랑 잘 어울리지 않기도 하고, 또 포폴에 하우징 프로젝트 하나쯤은 있어야 할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남들보다 두배 빠른 속도로 12월까지 졸업설계와 전시를 준비해야만 했다. 또 졸전 준비와 동시에 시간될때마다 포폴과 자소서를 틈틈히 업데이트하면서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정신 없는 한 학기를 보냈다. 그땐 정말 학기가 끝나고 졸업작품을 한번 더 손봐서 포폴에 넣을 수 있는 시간조차 없었기 때문에, 크리틱 때 매주 만들어가는 드로잉이나 매테리얼이 모두 포폴에 바로 들어갈 수 있는 퀄리티가 되어야만 했다. 다행히 정말 많은 사람들의 매우매우 크고 소중한 시다와 도움을 받으면서 간신히 모형도 프로젝트도 끝낼 수 있었다. 자기꺼 하는 것 보다도 훨씬 더 진심으로 도와준 친구들이 있었어서, 항상 그 애들한테는 볼때마다 평생 빚 진 마음으로 끊임없이 보은하겠다는 마음으로 살겠다고 다짐했고 그렇게 살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