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 + gsd (1)

2022.07 | cambridge

학부 입학하고 거의 매일을 술마시며 아무 생각없이 학교를 다니다가, 처음 유학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 건 아마 2015년 봄 언젠가 쯤이었던 것 같다. 물론 그때도 막 전역하고 신나게 놀면서 하루 단위로 살고 있긴 했었지만… 그래도 건축에 본격적으로 흥미가 생기기 시작한 3학년 설계 스튜디오는 아직도 확실히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있다. 3-1 스튜디오는 컬럼비아에서 공부하신 교수님과 독일에서 공부하신 교수님께서 코티칭 하시던 스튜디오였는데, 항상 건축 프로젝트는 평면, 입면, 단면도, 그리고 모형을 만들어야 한다는 틀에 박힌 내 생각을 제대로 깨부셔준 수업이었다. 교수님께서 넌 꼭 도면을 안그려도 되니까 만화책을 만들던 영화를 만들던 너가 하고 싶은 대로 프로젝트를 표현하라고 하셨는데, 그걸 듣고 ‘와, 외국에선 건축을 이렇게 하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워낙 모든걸 정해진 틀대로 따라가야 하는게 너무 싫었던 나는 건축에 그런 자유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처음 알았어서, 그때부터 무조건 탈조선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다. 물론 일반적인 고대건축 스튜디오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 그냥 내가 운이 좋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1학년 때 설계수업만 해도 도화지에 4b 연필로 선긋기만 주구장창 했으니까…

학기가 끝나고 대충 유학에 필요한 것들을 혼자서 이것저것 알아보자마자 이건 정말 막막한 일이라는 걸 바로 알게 되었다. 일단 2년 간 술만 먹으면서 날려버린 평점 2점 정도의 학점을 복구해야 했고, 그때까지 한번도 에이쁠을 못 받아본 스튜디오들의 사생아 같은 프로젝트들도 문제였다. 영어나 포트폴리오는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게 아니니까 걱정조차 되지 않았다. 정말 그때 내가 가진 스펙이라고는 대한육군병장만기전역증과 운전면허(2종보통)뿐이었다… 또 그때만 해도 고대건축은 한동안 유학가는 선배들의 대가 끊겨버린 유학 불모지였어서, 학교에는 유학이라는 과정에 대한 아무런 선배들의 선례도, 정보도 없었다. 더 끔찍했던 건 학교 교수님들조차 미국에서 공부하신 분들이 거의 없었고, 또 애들이 유학을 가지도 않으니 그나마 있으신 정보도 다 20년전에 머물러 있었다. 다만 다행히도 전임교수님들이 아닌, 겸임교수님들이나 강사분들은 좋은 학교에 유학을 가셨던 분들이 넘쳐났다.

그래서 일단 그 다음부터는 거의 모든 수업과 스튜디오를 무작정 미국에서 유학하신 (겸임)교수님들 위주로 듣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수강신청 할 때 마다 가장 우선순위는 수업 평가나 소문에 상관없이 교수님이 미국 유학파인가? 였고, 당장 운 좋게 3-2 스튜디오는 gsd 출신 교수님 두 분께서 가르치시는 스튜디오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4-1 스튜디오도 gsd와 mit에서 공부하신 교수님들의 스튜디오를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수업을 들으면서 점점 제대로 된 미국 유학과 미국 생활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나마 얻어갈 수 있었고, 내 졸업 후 목표를 gsd로 설정하고 그거 하나만 바라보고 달리게 되었다. 고대에는 워낙 정보가 없으니 홍대에서 하는 유학 세미나도 가보고 연대 교수님이 하시는 강연도 가면서 유학에 대한 감을 좀 잡을 수 있었다.

목표가 뚜렷해지니까 계획을 세우고 준비 해야할 일이 명확해져서 좋았지만, 반대로 떨어졌을 때 플랜b가 아예 없었어서 동시에 매우 불안해지기도 했다. 그래도 뭐 할 수 있는게 없으니…그때부터 과거를 청산하고 정말 누구보다 더 열심히 살기 시작했다. 일단 망해버린 학점을 복구하기 위해 매 학기 21학점을 꽉꽉 채워서 들었고 3-2부터는 스튜디오를 포함한 거의 모든 수업에서 에이쁠을 받았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이젠 내 인생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공모전도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냥 학교 밖의 세상은 어떤지 궁금해서 친구들과 방학 때 재미로 해보자 했던게 시작이었지만, 그러다 운 좋게 국제공모전에서 상도 받고 덕분에 해외 경험도 하게 되면서, 건축에 대한 시야가 좀 더 넓어지고 유학에 대해 자신감이 생기기도 했다. 특히 2018년에 했던 정림공모전은 마침 그 때 심사위원 세 분이 다 gsd 출신의 교수님들이었는데, 그땐 거기서 상을 받으면 gsd 스타일을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서 모든걸 걸고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대상을 받고 나선 gsd를 못갈 수 있겠다는 불안감이 살짝 사라지긴 했다🌝

공모전 상도 받을 만큼 받았고 스튜디오 결과물도 그럭저럭 잘 나오기 시작했지만 아직까지 갈 길이 막막했는데, 무엇보다 졸업 설계라는 가장 큰 산이 문제였다. 나 역시 건축 공부하는 모두가 그렇듯 졸업설계를 앞두고 욕심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고, 그러다 해보고 싶은 것도 배워보고 싶은 것도 점점 많아져서, 결국 나와 정반대 스타일인 교수님들의 스튜디오를 듣게 되었다. 스페인 교수님 한분과 완전 한국에서만 실무하시는 교수님 한분께서 가르치는 스튜디오였는데, 수업 목표가 약간 무조건 지어질 수 있는 현실적인 건물을 설계한다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졸업하고 아뜰리에에 취직하려는 사람들에게나 좋을만한 스튜디오였고 유학, 특히 미국 유학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느낌의 스튜디오였다.

사실 수업을 듣기 전부터 나와 안맞을꺼라는 걸 알았지만 내가 못하는걸 배워서 완벽한 포폴을 만들꺼라는 야심찬 마인드로 신청을 했는데, 정말 고생만하고 아무것도 얻어가지 못했다. 예전 4학년 때 교수님께서 해주신 말씀 중에 ‘건축 안에서도 모든 분야를 잘하는 사람은 없다, 자기가 잘하는 걸 잘하는게 제일 중요하다. 다 잘하면 그건 사실 다 제대로 못하는거다.’ 라는 명언이 있었는데, 그 말을 안 들었던게 참 후회가 됐다. 교수님 이제야 깨달아요..🥺

고대건축의 졸업설계는 보통 3월에 시작해서 두 학기를 한 후 12월에 최종 졸업전시를 하게 되는데, 그 중 반을 시원하게 날려버렸으니 매우 큰일이었다. 게다가 2학기는 다들 취준에 전시 준비, 포폴 준비로 수업도 제대로 안하는 분위기라서 정말 비상상황이긴 했다. 그래도 이렇게 있다간 2학기까지 날릴꺼 같아서 설계는 일단 쉬어가기로 결심하고 그 다음 학기엔 스튜디오 수강신청을 안했다. 또 마침 학점 복구라는 명분도 있었으니, 망한 수업들 재수강도하고 미대에서 듣고 싶었던 art history랑 다른 미학 교양도 맘껏 들으면서 한 학기를 신나게 보냈다. 아마 고대에 있던 8년 중 제일 스트레스 덜 받고 재밌게 다녔던 학기가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남은 6개월은 영어에 올인을 했다. 인생의 전부가 해커스였던 이 6개월은 내 유학 준비 기간 중에서 가장 끔찍했던 시간이었다. 지나고보면 포폴 준비나 졸업설계는 그래도 나름 즐기면서 했었던 것 같은데, 영어학원은 정말이지 꿈도 희망도 재미도 없던 심연 같은 곳이었다. 이젠 나한테 약간 군대랑 비슷하게 꼴보기도 싫은 느낌이 되어버린 강남역 10번출구로 매일 아침마다 학원을 가면서, 빨리 지겨운 영어말고 졸업작품이든 포폴이나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gre는 정말 말그대로 암흑 속에서 헤메는 그런 느낌으로 학원을 다녔었고, 토플은 1점을 올리려고 지겹게 시험을 계속 봤다. 그리고 마지막 시험에서 네 과목을 다 모든 학교의 preferred 기준을 넘기면서, 간신히 목표했던대로 어찌어찌 여름까지 토플과 gre를 끝냈다.

영어 문제가 해결된 2018년의 8월 쯤, 남아있는 일은 아직 시작도 제대로 안한 포트폴리오와, sop, 추천서 등등… 사실상 영어점수 빼고 다 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졸업 설계와 전시가 12월에 기다리고 있었다. 학교 어플라이가 보통 12월 말쯤 시작이니까 4개월 동안 졸전+포폴+어플라이 를 모두 끝내야 하는 말도 안되는 상황이었다. 특히 졸업설계 한 학기를 이미 날려버린 상태였던 나는 더 이상 한 순간도 시간 낭비를 해서는 안됐다. 정말 일주일 일주일을 잘 보내는게 중요했고 크리틱 한번 한번의 기회가 너무 소중했다. (그 와중에 예비군 동원 때문에 4일을 날릴 땐 진짜 남+북조선이 정말 원망스러웠다…🌚)

예전 5-1에 들었던 스튜디오는 유학엔 도움이 안되는 수업 같아서, 당장 바로 다른 교수님 스튜디오로 런했다. 워낙 설계 안하는 애들이 몰리는 꿀빠는 스튜디오로 유명한 곳이었지만 그래도 평이 좋은 교수님들이었고 무엇보다 두 분이 다 유학파셔서 포폴 준비에도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았다. 문제는, 보통 졸설은 일년을 쭉 같은 스튜디오를 듣는게 일반적이다보니 나만 혼자 스튜디오에서 굴러온 돌이었고, 또 다른 애들은 이미 프로젝트는 1학기에 거의 다 끝내고 취준에만 올인하는 상황이라 나 빼고는 다들 이미 졸업설계가 어느정도 완성된 상태였다. 그래서 교수님도 애들도 수업은 그냥 대충대충 넘어가는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그래도 난 도저히 1년 전에 하던 프로젝트는 다시 소생시킬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시간은 없지만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기로 했다.

예전에 공모전에서 서울 한복판에 공동묘지를 하다가 망한 적이 있었는데, 그걸 다시 살려보면 어떨까 싶어서 교수님께 슬쩍 가져 갔다. 교수님께 보여주자마자 역시 바로 대차게 까였고, ‘왜 죽은사람을 하려하냐, 그냥 산 사람으로 해라—아파트해 아파트!’ 라는 교수님의 무정한 한마디에, 한순간에 졸업설계 주제가 공동묘지에서 하우징이 되었다. 참 까칠하고 무서웠던 교수님이시지만,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매우매우 고마우신 귀인이다. 공동묘지나 죽음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학부생이 깝친다고 졸설 주제를 공동묘지로 하는게 참 같잖아 보이시지 않았을까... 사실 그런 감성적이고 철학적인 건축이 사실 나랑 잘 어울리지 않기도 하고, 또 포폴에 하우징 프로젝트 하나쯤은 있어야 할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남들보다 두배 빠른 속도로 12월까지 졸업설계와 전시를 준비해야만 했다. 또 졸전 준비와 동시에 시간될때마다 포폴과 자소서를 틈틈히 업데이트하면서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정신 없는 한 학기를 보냈다. 그땐 정말 학기가 끝나고 졸업작품을 한번 더 손봐서 포폴에 넣을 수 있는 시간조차 없었기 때문에, 크리틱 때 매주 만들어가는 드로잉이나 매테리얼이 모두 포폴에 바로 들어갈 수 있는 퀄리티가 되어야만 했다. 다행히 정말 많은 사람들의 매우매우 크고 소중한 시다와 도움을 받으면서 간신히 모형도 프로젝트도 끝낼 수 있었다. 자기꺼 하는 것 보다도 훨씬 더 진심으로 도와준 친구들이 있었어서, 항상 그 애들한테는 볼때마다 평생 빚 진 마음으로 끊임없이 보은하겠다는 마음으로 살겠다고 다짐했고 그렇게 살고있다🥺

워낙 시간이 촉박하고 절박하다보니 급한대로 유학 준비하는 사람들은 다 한번쯤은 들어본 포트폴리오 학원도 찾아갔다. 다들 알다시피 건축 유학 세계에서 유명한 큰 학원은 두 개가 있고 그 중에 보통 프라운라움이 좀 더 건축적이라고들 하지만, 아트필이 바로 집 앞에 있어서 별 고민없이 아트필로 정했다. 학원엔 일대일 포폴 수업 말고도 가서 프로젝트를 새로 하는 수업도 있었는데, 나는 워낙 공모전도 많이 하기도 했었고 포폴에 넣을 프로젝트 개수 자체는 이미 과할정도로 넘쳐났어서 굳이 내 상황에 필요한 것 같진 않았다. 학원이 입시에 크게 도움이 되냐마냐는 다들 의견이 갈리는 부분이지만 그래도 유학 준비하는 사람들을 실제로 보면서 같이 작업하다보니 스스로 자극도 좀 되고 정보도 얻고 친구도 생기고… 여러모로 도움이 되긴 한 것 같다.

내 성격이 쪼금이라도 맘에 안들거나 시원찮은 부분이 보이면 빨리빨리 못넘어가고 다 해결되어야 일이 진행이 되는 스타일이라 포폴 첫 시작이 매우 더뎠다. 레이아웃 정하기부터 폰트 고르기, 커버 디자인 등등 (쓸데없지만 매우 중요한) 일들에 시간을 꽤나 날렸다. 그땐 또 왜 그런게 제일 재밌는건지... 폰트만 정말 한 30번은 바꿔본 것 같다. 그래도 매일 같이 issuu를 들락거리면서 다른사람들 것도 많이 보고 맘에 드는 레퍼런스도 찾으면서 서서히 나만의 스타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솔직히 그때 제임스렝 포폴을 정말 많이 참고했고 그걸 많이 따라하려 했었는데, 아무리해도 도저히 그 느낌을 똑같이 낼 수가 없었고 그러다보니 나만의 기이한 혼종 같은 스타일과 레이아웃이 만들어졌다. 그런거 보면 암만 누구껄 보고 따라한다한들 자기만의 색깔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긴 하구나 싶었다.

그렇게 11월쯤 되니 포폴에도 점점 매테리얼들이 채워지면서 와꾸가 어느정도 잡히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참 포폴이 매우매우 애매한 상태였다. 사실 뭐 매테리얼이야 잠안자고 작업하면 되는거고 자소서는 아무 생각없이 쓰면 쓰는거지만, 그 안에 나만의 색깔과 이야기를 담는게 가장 힘들었다. 성공적인 입시를 위해서는 포폴이나 자소서 모두 일관성 있게 나만의 이야기와 강점을 부각시키는게 가장 중요한데, 대부분의 학부생들이 그렇듯 나도 내가 뭘 잘하는지 제대로 감을 못잡고 있었다. 특히 난 스튜디오에서 항상 교수님께 매우 큰 영향을 받고 휘둘리는 편이었어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학교 다닐 때는 그냥 스튜디오에서 프로젝트 만들어가는게 좋았었고 또 교수님이 매주 크리틱 때 시키는대로 열심히 해가는 말 잘듣는 학생이었어서, 지금까지 한 프로젝트 스타일도 교수님 따라 정말 천차만별이었다. 그리고 또 공모전을 할 때는 워낙 상 받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했었으니까...그래서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어떤 건축을 하는지, 나의 건축 스타일이 정확히 뭔지 몰랐다.

그래서 사실 처음에 포폴을 만들 때도 이것저것 다 잡으려는 욕심에 조금 헤메기도 했는데, 지나고보니 그럴 땐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 내 작업을 바라보는 것이 꽤나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남들이 보기엔 항상 똑같은 것만 하는 것 같은 스타일이 매우 뚜렷한 사람들 조차도, 스스로 생각할 때는 자기가 어떤 스타일이고 무엇을 잘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렇다. 나도 그랬다. 많은 사람들이 나보고 학부생인데도 스타일이 엄청 강하고 뚜렷하다고 했었는데, 그땐 나도 그게 무슨말인지 잘 몰랐다. 그래서 학원 수업 말고도 주변의 많은 교수님들, 선배들에게 포폴을 보여주고 계속해서 피드백을 받았는데, 그 조언들이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조언의 반 이상은 한 귀로 흘려버렸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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