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디오에서 실무적인 측면의 urban design, 혹은 마스터플랜 프로젝트에 접근하는 기본적인 디자인 방법을 배웠다면, 세미나에서는 좀 더 학문적이고 이론적인 urbanism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 그래도 역시 학교는 학교라 그런지 아주 실무적인 urban design보다는 좀 더 이론적이고 학문적인 urban design에 더 집중하려는 분위기가 강했다. 스튜디오에서 프로젝트를 할 때도 최대한 공공적이고 사회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argument와 내러티브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아카데미아에서 개발과 이윤을 추구하는 실무적인 걸 굳이 가르칠 필요는 없으니까 당연한 분위기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사실 워낙 하버드 학풍 자체가 (대부분의 미국 학교가 그렇긴 하지만) 굉장히 좌파적인 성향이 강하기도 하고, 또 gsd가 나름 디자인스쿨이다보니 학생들과 교수들도 진보적인 성향이 매우 강했다. 그래서 도시 정책이나 공공적인 이야기를 다룰 때는 다소 나이브하고 이상적인(+극좌파적인🌚) 이야기도 많았다. 특히 거의 사회주의자에 가까운 라훌이 maud 체어가 되면서 더욱 이런 분위기가 심해진 것 같았다. (게다가 당시 미국 분위기가 워낙 인종차별(흑인)에 민감했을 때라 urban design 분야에서도 인종 얘기들이 빠짐없이 등장했다..) 정치적으로 내 취향은 아니었어도 뭐 그런건 공공적인 분야를 다루다보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내러티브 자체는 일단 겉으로는 너무 그럴싸하고 아름다워 보였고 또 다들 말도 참 잘해서, 나름 남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 프레젠테이션 방법을 여러모로 배운 것 같기도 하다.
세미나에서는 기본적인 urban design의 이론과 역사뿐만 아니라 전세계 여러 도시의 urban design 성공 사례들을 배울 수 있었다. 대부분 학부 때 도시 수업에서 한번씩 들어본 내용들이었지만, 그것보단 좀 더 현대적인 사례와 실제로 지어진 프로젝트들을 중심으로 다루었다. 특히 전세계 여러 도시들이 다양한 도시 및 사회 이슈에 대해 어떻게 각자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갔는지에 대해서도 많이 다뤘는데, 단순히 건축이나 디자인 뿐만 아니라 urban planning, policy, 부동산과 조경 등 다른 관련 분야의 내용까지 굉장히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었다.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관점과 입장으로 건축 프로젝트들을 바라볼 수 있어서 흥미롭기도하고 매우 유익했다. 다만 모든 세미나 수업들은 매 수업 엄청난 양의 리딩을 바탕으로 하는 토론+글쓰기가 베이스였어서, 정말 쉴 틈이 없이 수업에 질질 끌려다니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내일을 준비해야 했다.
세미나에서 다뤘던 내용 중에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아있는 매우 흥미로운 주제 중 하나는, 건축에서도 urban design에서도 너무 유명한 프로젝트인, 런던의 테이트모던에 관한 이야기였다. 헤르조그가 버려진 화력발전소를 미술관으로 탈바꿈시킨 테이트모던은 2000년 개관 이후 대성공을 거두며 이제는 명실공히 런던을 대표하는 건축물이 되었다. 사실 헤르조그는 건축을 공부한다면 누구나 좋아하는 건축가이고 테이트모던 역시 한번 가보면 누구나 좋아할 수 밖에 없는 건축물이다. 물론 나도 그랬다. 그렇지만 테이트모던을 건축적으로 깊게 파본적은 딱히 없었고, 그동안 테이트모던을 볼 때도 별 생각없이 'reuse도 잘했고 디자인도 잘한 좋은 미술관이구나…'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미나 수업의 첫 주부터 꽤나 흥미로운 질문이 수업 주제로 던져졌는데, 바로 '테이트모던이 거둔 성공이 과연 건축 디자인 덕분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리고 과연 테이트모던을 건축 프로젝트로 봐야하는가 아니면 urban design 프로젝트로 봐야하는가.' 였다. 정말 학부 때 건축을 공부하면서나 직접 미술관에 가봤을 때는 전혀 생각해보지도 못한 주제이고 접근 방법이었다.
urban design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프로젝트의 컨텍스트는 대략 이렇다. 20세기 후반까지 런던은 템즈강을 경계로 남쪽 지역과 북쪽 지역이 극심한 양극화를 겪고 있었다. 템즈강 북단 지역은 전통적으로 런던의 정치, 경제, 문화 및 종교의 중심지 역할을 하며 발전해온 반면에, 강의 남단 지역은 낙후된 산업 시설과 빈민 주거 단지가 모여있는 가난하고 슬럼화된 지역에 머물렀다. 이런 상황 속 1990년대 초, 런던시는 2000년을 맞이하며 소위 '밀레니엄 프로젝트'라고 불리는, 대규모 도시 개발 및 재생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프로젝트의 큰 목표 중 하나가 바로 남북의 불균형 해소였다. 이를 위해 남쪽의 개발을 지원하는 여러 도시, 건축 정책들이 제정되고 프로젝트들이 진행되게 된다.
남북을 연결하는 보행 다리 건설(밀레니엄 브릿지), 템즈강 남단의 워터프론트 개발과 랜드마크 건설(런던아이) 등등 21세기 런던의 cityscape을 상징하는 굵직굵직한 프로젝트들이 모두 이 시기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테이트모던 역시 이 밀레니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당시 버려진 산업 시설이 즐비하고 아무것도 없던 템즈강 남단에 현대미술관을 만들겠다는 테이트 재단의 (당시엔 뜬금없는) 아이디어는, 강남을 개발하겠다는 목표가 뚜렷했던 런던시와 지자체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1994년, 테이트와 런던시는 서로 협력하여 화력발전소를 미술관으로 탈바꿈 시키는 국제공모전을 열게 된다. 참가자들에게 주어진 조건은 '발전소의 원형을 보존할 것, 그리고 미술관 앞마당과 1층 공간을 공공에게 개방된 퍼블릭 스페이스로 만들 것'이었다. 그렇게 헤르조그의 당선안으로 지어진 테이트모던은, 개관 이후 단숨에 세계의 유명 미술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미술관으로 급성장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누가봐도 대성공이라고 할 수 있는 테이트모던의 성공이, 헤르조그의 건축 디자인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넓은 관점에서 보면 테이트모던은 런던의 남쪽을 살리기 위해 진행된 밀레니엄 프로젝트의 수많은 여러 프로젝트 중에 하나일 뿐이었다. 테이트모던이 지어지던 때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남쪽의 테이트모던과 북쪽의 세인트폴 대성당을 연결하는 보행교인 밀레니엄 브릿지가 지어지게 되었고, 템즈강 남단의 워터프론트 역시 완전히 새로운 모습의 보행 친화 공간으로 탈바꿈되게 되었다. 또 런던아이와 밀레니엄 돔 등 여러 공공프로젝트도 모두 강남에 지어지면서, 런던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자연스럽게 강남으로 유입될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테이트모던 국제공모전에서는 참가자들에게 '미술관의 지상공간을 완전히 공공에게 개방한다'는 조건까지 더해지면서, 테이트모던은 템즈강 남쪽의 보행자들이 당연히 자연스럽게 방문할 수 밖에 없는 공간이 되었다.
세미나에서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포인트가 이 부분이었다. 이런 관점으로 프로젝트를 바라본다면, 테이트모던은 헤르조그가 아니라 그 누가 디자인 하더라도 성공할 수 밖에 없었던 프로젝트라고 볼 수 있다. 이미 90년대초부터 도시계획 전문가들과 정책 전문가들이 10년동안 구상하고 계획한, 정교하게 짜여진 세팅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이 미술관 프로젝트의 핵심 가치는 헤르조그의 건축적인 디테일보다는, 오히려 도시적, 사회적 컨텍스트에서 더 큰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미술관의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건축가가 아닌 urban designer와 planner가 아니었을까? 수업에서는 이러한 주제에 대해 서로 토론하고, 글을 읽고 쓰면서 각자의 생각을 정리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저 질문에 대해 100% 동의하지는 않는다.(나는 헤르조그빠이긴 하다ㅎ) 분명 내부 터빈홀의 자연스러운 경사와 보행 동선 등 미술관 자체에도 매력적인 건축 디테일이 있고, 아무나 디자인 했어도 성공했을꺼라는 주장은 조금 극단적으로 건축을 무시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도시계획적 관점에서 봤을 때 성공이 미리 계획된 프로젝트라는 주장은 내게 꽤나 설득력있게 다가왔다. 특히 도시 내에 여러 프로젝트들이 합쳐져서 목표한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구상한 계획 역시 매우 정교하고 전략적이었기에 미술관이 성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실 당연히 이분법적으로 생각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고, 입장 하나를 딱 고르라고 던진 질문이 아니기도 하다. 그래도 일반적인 건축 수업에서나 학부 때에는 쉽게 생각해보기 어려웠던 관점의 주제를 제시했다는 점은 분명했다. 특히 urban design을 처음 제대로 접하는 코어 학기에서, urban design이 가지는 영향력과 실제 성공사례를 배울 수 있었던 좋은 주제가 아니었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