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g + 코펜하겐 (2)

2021.03 | copenhagen

6개월 남짓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직접 와서 경험해보니 big는 예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괜찮은 회사였다. 특히 여기저기서 흔히 보이는 그저그런 건물들보다, 못생겨도 최소한 새로운 실험과 시도를 해본 건물들이 더 낫다는 말은 앞으로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역시 한때 건축 최전선에서 새로운 트렌드를 이끌어가던 회사 다운 말이었다. 지금은 호불호가 가장 많이 갈리는 건축 회사 중에 하나가 되었지만, 그래도 기존 건축계의 틀을 깬 혁신적인 회사였다는 것엔 다들 이견이 없지 않을까 싶다.

다만 다른 많은 회사들이 다 그렇듯 여기도 프로젝트 따라서 퀄리티가 매우 복불복인 듯 했다. 사실 워낙 회사가 전세계적으로 확장하면서 몸집이 커지다 보니, 개별 프로젝트들에 대한 비야케의 관심이나 열정이 떨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듯 하다. 특히 비야케는 요즘은 현상이 아니면 적극적으로 참여하려 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내가 참여했던 프로젝트들도 웹사이트에 publish도 되지 않는 돈을 벌기 위한 프로젝트들이 대부분이 었어서 아쉬움이 좀 남긴한다. 줄리아도 부다페스트 마스터플랜은 자기가 big에서 한 프로젝트 중에 제일 재미없던 프로젝트였는데, 혹시라도 프로젝트 때문에 내가 big가 나쁜 회사라고 생각 안했으면 좋겠다고 위로 아닌 위로를 해주기도 했다. 

big를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대표적인 정체성이라면 역시 geometry와 프레젠테이션 두가지가 아닐까 싶다. 모든 디자인이 아주 심플한 조형에서 시작하다보니 자연스럽게 프레젠테이션까지도 심플하고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읽히는건, 이젠 big만이 가질 수 있는 강력한 장점이자 무기가 되었다. 가구부터 마스터플랜까지 다양한 스케일의 프로젝트들이 있지만, 그 베이스에는 항상 geometry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이 넓게 깔려있다. 8house나 mountain같은 초창기 작품부터 최근 bigU, toyota woven city까지보면, 프로젝트의 스케일에 상관없이 geometry에 대한 다양한 시도와 실험을 그래도 성공적으로 계속해오고 있는 듯 하다. 특히 심플한 조형에서부터 뻗어져 나와서 프로젝트 전체를 관통하는 직관적이고 강력한 컨셉은, 이젠 big를 가장 잘 대표하는 아이덴티티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회사 홈페이지나 출판된 책에서 보면 알 수 있듯, big의 모든 프로젝트들 각각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로고가 만들어진다. 예전부터 항상 이 프로젝트 로고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가 참 궁금하긴 했었는데, 사실 만들어지는 과정은 프로젝트마다 천차만별이라고 한다. 중간에 계속 바뀌기도 하고, 팀원들끼리 작게 공모전을 하기도 한다고도 하는데, 우리 팀은 줄리아가 미팅 한시간 전에 혼자 그냥 만들어서 그걸 끝까지 썼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아무도 불만을 표시하지 못했다... 프로젝트 로고라는게 어떻게 보면 참 간단하고 별 것 아닌 아이디어지만, 프로젝트가 어떤 스케일이나 성격인가에 상관 없이 그렇게 하나의 작은 아이콘으로 압축해서 표현 할 수 있다는 점이 big의 정체성을 가장 잘 나타내서 보여주는 부분인 것 같다. 결국 프로젝트의 핵심은 가장 최소화된, 심플한 geometry로 설명할 수 있다는 big만의 철학과 디자인 프로세스는, 내가 인턴하면서 가장 많이 배웠고 앞으로도 더 기르고 싶은 능력이기도 하다.

big 프로젝트의 로고들

이렇게 geometry에 대한 믿음이 강한 big 이지만, 이런 조형에 대한 집착이 역으로 회사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무한으로 창의적인 형태를 계속해서 생산하기엔 역시 한계가 있으니, 그동안 자기들이 해왔던 것들에서 자기복제를 반복하고 있는듯한 느낌이랄까? 그러다보니 사이트나 프로젝트 성격에 상관없이 그냥 일단 익숙한 geometry를 때려박고 시작해서, 결국 어정쩡한 자기복제 프로젝트로 끝나는 경우도 많은 것 같았다. 팀에서 우스갯소리로 하던 이야기 중 하나가, 픽셀 컨셉은 회사에도 하도 많이 해서 앞으로 픽셀을 또 하면 벌금을 내야 된다는 것이 었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우리 프로젝트는 다이아몬드 픽셀이니까 괜찮을 꺼라고 했다. 사실 어떻게 보면 픽셀 같은 파라메트릭이 이젠 big의 대표 디자인 스타일이 되어 가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기서 아예 오래 일하기엔 그렇게 좋지만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약간의 매너리즘에 빠진 것 같은 big가 앞으로 어떻게 발전해 나갈지도 궁금하다.

비야케를 건축계의 슈퍼스타로 만들어준 ted 강연이나 yes is more 만화책처럼, 클라이언트와 대중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프로젝트를 전달시키는 힘은, 어쩌면 디자인보다도 big가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과 기반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특히 작년 ces에서 보여준 비야케의 toyota woven city 프레젠테이션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사실 회사에서도 시니어들의 스토리텔링이나, 프레젠테이션 네러티브 만드는 과정을 보고 있으면 가끔 정말 놀랍고 감탄스럽기까지했다. 물론 그 내러티브의 반 이상은 듣기에만 그럴듯한 허울뿐인 말들이지만, 내가 클라이언트라도 혹해서 그대로 지을 것만 같이 설득력이 있었다. 왜 사람들이 big를 장사꾼이라고 욕하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다만 비야케는 그렇게 대단한 세계적인 명성 만큼, 그리고 회사 오기전에 기대했던 것 만큼 프레젠테이션을 잘하진 못했다. 계약서 상으로도 그렇고, 클라이언트가 비야케가 직접 미팅에 얼굴을 비추고 발표하길 원할 때가 종종 있었는데, 그때마다 내가 다 클라이언트한테 미안할 정도로 엉망인 경우도 많았다. 사실 비야케는 이제 워낙 바쁘다보니 프로젝트가 무슨 내용인지도 잘 모른 상태로 미팅에 들어가서 발표하는 경우가 많아서 어쩔 수 없는 것 같긴 했다. 그래도 다른 파트너들이나 시니어들이 말을 워낙 잘해서, 이걸 옆에서 지켜보는 것 만으로도 큰 배움이 되었고 나의 귀중한 자산 중 하나가 되었다. 

big cph

big의 프레젠테이션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역시 다이어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한국 건축학과 학생들의 기본 그래픽 스탠다드에 영향을 가장 많이 끼친 representation 방법이 아닐까. 사실 나도 학부 3학년 쯤엔 big 다이어그램을 따라하려고 이것저것 참 많이 시도해봤던 기억이 있는데, 그래서 회사에 오고 서버에서 가장 먼저 찾아본게 big 다이어그램 폰트이기도 했다. 이젠 매우 클래식하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유치한 big의 다이어그램이 되어버렸지만, 아직도 사람들에게 컨셉을 설명할 때 그만큼의 효과적인 다른 방법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이어그램으로 유명한 회사답게, 회사에서도 사람들이 정말 과하다 생각될 정도로 다이어그램으로 생각하고 얘기하고 디자인한다. 마치 다들 세상을 다이어그램으로 보고 있는 것처럼 생각 회로가 개조된 사람들 같았다. 절대 쓸데없이 복잡한 그래픽에 시간낭비 안하고, 겉보기에 많이 유치해보여도 스토리텔링과 정보전달만 100% 될 수 있도록 다이어그램을 만들고 또 그걸 프로젝트 마감 때 까지도 그대로 사용한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지나고 프로젝트가 복잡해져도 디자인 프로세스는 계속 명료하고 깔끔해서, 서로 의견을 공유하기도 쉬운 듯 했다. 다만 그래서 조금만 다이어그램이 어려워져도 사람들이 열심히 듣질 않고 거부반응을 보인다. 이런 simple&clear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사실 장점인지 단점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리고 가끔 다이어그램이 그대로 실제 건물이나 파빌리온으로 지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한국 지방도시 마을 축제에서나 볼듯한 괴랄한 공공조형물 같아서 두 눈을 의심하기도 했다.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의 느낌이지만, big는 한번쯤 일해보긴 정말정말 좋은 회사였다. 절대 다른 덴마크나 북유럽 회사들 같은 느낌의 디자인 회사는 아니지만, 체계적인 회사 시스템과 자유로운 분위기는 참 좋았다. 딱 넷플릭스 abstract 비야케편에서 느꼈던 그런 느낌이었다. 업무강도는 상당히 빡셌어도 그만큼 팀 사람들끼리 가깝게 지낼 수 있어서 좋았고, 회사에서 재밌는 이벤트들도 종종 있었어서 지루하진 않았다. 퇴사하는 마지막 날까지 야근시켜서 참 기분이 오묘했지만 그래도 6개월의 덴마크 생활은 유학오고 첫 회사의 좋은 기억으로 평생 남을 것 같다. 또 회사에 얼마 없는 한국 사람들끼리 그래도 짧은 기간동안 이런저런 재밌는 자리도 많았고, 여러모로 날 잘 챙겨줘서 참 고마웠다. 미국에 비하면 외지인으로 살기엔 너무 척박했던 코펜하겐이었어도, 그래도 살면서 한번쯤 이런 조용하고 차분한 도시에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최근 cj의 통수로 회사에서의 한국 이미지가 좀 안좋아진것 같지만, 서울에도 big 건물이 몇개라도 좀 지어지면 꽤 잘어울리고 괜찮을 것 같은데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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