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p + 퇴사: 희망편 (1)

2026.03 | new york

22년 8월부터 시작된, 장장 3년 8개월에 가까운 회사 생활이 끝났다. 처음 여기 들어올 때만 해도, 1년이 지날 때만 해도, 그리고 2년, 3년이 지날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래 다닐 생각은 없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정말 시간이 휙휙 지나가기 시작했다. 사실 입사 후 2년 정도 지난 쯤 부터는 하루에 두번씩 퇴사를 생각하면서 회사에 다녔던 것 같은데… 이러다가 정말 타이밍 놓치면 영영 못나가고 회사에 묶여 있을 것 같아서 부랴부랴 이직을 결정하고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다닐 때는 정말 매일매일 회사를 욕하면서 다녔지만, 그래도 지나고 보면 정말 많이 배우긴 했다. 처음 입사했을 때와 지금을 비교해보면, 내가 봐도 거의 다른 레벨의 사람이 되었다는게 느껴질 정도로 많이 배웠다. 사실 매년 연차가 쌓일 수록 ‘아, 작년과 비교하면 참 많이 성장했구나’ 하고 스스로 느껴지는 순간들이 많았으니까, 그래도 조금씩이지만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긴 했나보다.

미팅에서 무슨 얘기하는지 잘 이해하지도 못하고 따라가는데 급급했던 나는 어느새 컨설턴트 미팅에 회사 대표로 혼자 들어가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 되었고, 팀을 대표해서 이메일을 보내고 미팅을 잡을 때도 팀장 컨펌없이 혼자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는 회사에 참 많이 감사하기도 하다. 처음에 영어도 제대로 못했던 내게, 끊임없이 기회를 주고, 들어주고, 계속 끌고 가려고 했던 회사였으니까🥺

내가 shop에 처음 들어왔던 2022년은 회사가 유니온으로 한창 난리가 난 직후였다. 그 여파로 shop은 대부분의 중간 레벨 어쏘들을 대거 잃게 되었다. 회사의 가장 큰 일개미들인 4-5년차들이 한번에 확 사라져버렸으니, 회사 입장에서는 급히 staffing 공백을 메꿔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shop은 경력직을 뽑는 대신 신입들로 그 공백을 메꾸기로 한다. 대규모로 신규 채용을 해야하는 그 타이밍에 마침 딱 졸업하는 학생이었던 나는 비교적 쉽게 회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내가 입사했을 때 회사엔 중간 연차의 사람들이 턱없이 부족했다. 신입들 위에는 중간이 없고 최소 8-10년차들의 시니어, AP들이 대부분이었고, 자연스럽게 기존 중간레벨이 하던 일들은 신입들이 도맡아서 해야했다. 디자인 스터디, 프로덕션뿐만 아니라 컨설턴트 coordination, 레빗, drawing set documentation까지, 일반적인 회사라면 중간 연차들이 해야할 일들을 신입들이 모두 담당하게 되었다. 내가 처음 들어간 팀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대로 된 team structure와 멘토 시스템이 없어졌으니 하루하루가 스트레스와 고통의 연속이었다. 컨셉이나 디자인 스터디는 주니어들도 쉽게 할 수 있으니 크게 상관 없었지만, 특히 처음 해보는 DD, CD를 한창 할 때는 더욱 그랬다. 살면서 한번도 해본 적 없는 것 투성인데, 또 팀에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든 해내야 했다. 그런데다가 비슷한 시기에 입사한 동기들은 또 대부분 경력직 신입들이었어서, 괜히 비교되고 뒤쳐질까봐 그게 또 더 스트레스였다. 심지어 입사 초기에는 회사에서 사람들을 왕창 해고하던 때 였어서 더욱 performance에 대한 부담이 크게 다가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PM들이나 다른 윗사람들도 참 답답했을꺼다. 기껏 몇년 동안 다 키워놓은 사람들이 다 사라지고 처음부터 신입들과 다시 시작해야했으니... 나도 당시에는 ‘shop은 신입들에게 기회를 많이 주는 좋은 회사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지나고보면 그냥…회사에 돈도 없고 사람도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고난의 시기였다..

하지만 받았던 스트레스만큼, 동시에 짧은 기간 동안 급성장 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PM들은 워낙 바쁘니까 신입들에게 하나하나 알려줄 수가 없는 상황이 많았어서, 혼자 이것저것 주체적으로 알아보며 일을 헤쳐 나가야 했다. 다섯명도 채 안되는 팀에서 몇백장이 넘는 DD set을 만들어내야 했으니, 좋은 선생님은 없었지만 독학하기엔 최고의 세팅이었달까..🫠

그렇게 점점 미팅에 혼자 들어가는 일도 점점 잦아졌고, 자연스레 영어로 미팅하고 이메일 쓰는 일들도 점점 편해지기 시작했다. PM조차도 잘 몰라서 내가 직접 연락을 하고 처리해야 하는 일들도 많아졌다. 맡은 프로젝트들도 DD, CD로 넘어가면서, 주로 하는 일들도 디자인, 프로덕션보다는 미팅, 코디네이션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라이노는 몇 년동안 킬 일이 없었고, 하는 일의 99%는 레빗과 블루빔, 아웃룩에서 이루어졌다. 일을 좀 망쳐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나서는 멘탈이 더 강해지고 여유가 좀 더 생기기도 했다.

경력이 2년, 3년 쌓이다 보니까 서서히 프로젝트의 큰 그림이 보이기 시작했다. 프로젝트의 전체적인 흐름이 보이니까 내가 지금 무슨 일을 왜 하고 있는지 알게 되고, 어느 부분에 힘을 쏟고 어느 부분은 힘을 아껴도 되는지도 점점 보이게 되었다. 무작정 100% 파워로 프로젝트의 모든 부분에 에너지를 다 쏟아내려고 했던 신입 때보다는 확실히 좀 더 시간 분배를 할 수 있게 되면서 몸도 마음도 여유로워졌다. 점점 더 PM과 파트너들의 입장에서 프로젝트를 볼 수 있게 되었달까. 그래서 운 좋게 승진의 기회도 빨리 찾아왔고, 연차에 비해 더 높은 레벨의 업무를 할 기회들이 많았다.

그래서 shop을 다니면서 많이 배운 건 디자인 자체보다는, 오히려 디자인 외의 부분이었다. 어떻게 디자인을 회사 밖의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프로젝트를 진행시킬 것인지, 누구에게 언제 무엇을 보내고 받아야 하는지, 어디까지가 건축 회사의 책임인지 등 — 말그대로 미국 건축 회사에서 일하는 방식, 미국 건축 산업의 시스템을 배웠다. 단순히 디자인 프레젠테이션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는 알려주지 않는 미팅, 이메일, 비즈니스 영어 등등 — 모든게 새로웠고 힘들었지만 그래서 그만큼 배우는 것도 많았다. 공공, 디벨로퍼, 시공사, 그리고 수 많은 컨설턴트들이 모두 엮여 있는, 미국의 건축 산업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건축 회사는 그 시스템 안에서 어떤 역할인지를 느끼고 배울 수 있었다.

사실 디자인보다는 프로젝트 매니징의 영역에 가깝지만, 매니징은 프로젝트에서 디자인만큼이나 중요한 부분이고, 학교에서나 큰 회사에서, 특히 주니어 레벨 때는 쉽게 경험 하기 힘든 영역이다보니 오히려 더 귀중한 경험으로 느껴졌다. BIG에서 일할 때는 한 팀 안에 디자인 역할과 프로젝트 매니징 역할이 따로 나눠져 있었고, design lead와 project manager도 각각 다른 사람이 맡곤 했다. 반면에 shop은 따로 역할 구분 없이 모든 것을 어느정도 할 줄 알아야 했기에, 다행히 주니어 때부터 클라이언트 미팅, 공무원 미팅 등 이런저런 큰 미팅들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신입 때 부터 해외 출장도, 클라이언트 회식도 다 데려가곤 했으니까, 확실히 회사 안에서도 적극적으로 기회를 주려는 분위기 였던 것 같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건축 프로젝트 전체에서 보면 디자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미미하다. 건축가에게 주어지는 design fee만 봐도 그렇고… 사실 냉정하게 생각하면 디자인은 그냥 말 그대로 그림일 뿐이고,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그저 상품에 불과하다. 그 그림을 어떻게 실제로 만들고 팔아서 수익, 가치를 창출할 것인가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shop은 마침 디자인 회사 중에서는 꽤나 디벨로퍼의 mindset을 가지고 있었는데다가, 또 나름 브랜딩과 장사를 잘하는 편인 회사였어서, 현실 세계에서 건축 회사가 가져야 하는 전략, 포지셔닝을 배우기엔 최적의 회사였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진짜 현실 세계의 건축 — 켄고 쿠마가 말했던 것처럼 어른들의 언어(!)로 이야기할 줄 알아야 하는 건축 — 극도의 capitalism이 지배하는 미국과 뉴욕의 건축 산업, 비즈니스 무대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배웠다. 아무래도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고도로 발달된 시스템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나라이다 보니까, 그 시스템을  짧게 나마 직접 경험할 수 있었던 것 자체로 좋았다. 어떻게 보면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일하면서만 배울 수 있는 값진 경험이 아닐까? 한국에서는 제대로 일해본 적이 없어서 그 차이가 정확히 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나중에 두 나라의 시스템을 비교해봐도 재밌을 것 같다.

특히 퇴사 전에 일년 동안 몸 담았던 뉴욕 마스터 플랜 프로젝트는 뉴욕 건축 시스템을 배우기에는 최고의 환경이었다. 이미 디자인이 어느정도 정해진 상태에서 팀에 합류했지만, 뉴욕에서 그래도 제대로 틀을 갖춘 건축 프로젝트의 프로세스를 일 년 가까이 경험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뉴욕 메츠라는 매우 뉴욕뉴욕한 클라이언트와 일하면서 몰랐던 뉴욕의 역사와 문화를 배울 수 있었던 점도 좋았고, field operations, pentagram같이 다른 뉴욕을 대표하는 여러 디자인 회사들, 컨설턴트들과 일하는 것도 재밌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PDC, EDC, Parks 같은 뉴욕 공공 기관들과 일하며 뉴욕의 공공 건축 시스템을 경험할 수 있어서 가장 좋았다. 웬만한 건축 회사들에서는 해볼 수 없는 경험이고, shop 안에서도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기회여서 정말 재밌게 일했다. 건축 전공이 아닌 공무원들을 상대해야 하다보니 회사 내 대부분 사람들이 귀찮아 하거나 기피했지만, 나에게는 프로젝트의 베스트 부분이자 뉴욕 urban design의 꽃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귀중한 경험이었다. 만약 조금 더 일찍 뉴욕 팀으로 옮길 수 있었다면 좀 더 재밌게, 적극적으로 회사를 다닐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도 했다. (사실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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